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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흥사 범종의 學術的 價値와 造形美

I. 운흥사 범종의 學術的 價値와 鑄成匠

1. 운흥사 범종의 학술적 가치
1) 운흥사 범종의 형태와 양식특징
<운흥사 범종>은 康熙 29년(조선 숙종 16)인 1690년에 만들어진 범종으로서 현재 일본 동경시내의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운흥사 범종, 1690

몸체에 비해 鍾口가 더 벌어져 아래쪽이 넓어진 사다리꼴 형태의 범종으로 정상부에는 종고리 역할의 鍾鈕와 함께 天板에는 覆蓮帶가 둘러져 있으며, 어깨 부분에는 梵字가 들어 있는 圓圈紋이 빙 둘러져 있다.
몸체의 鍾腹 부분 네 곳에는 각각 唐草紋帶의 테두리가 둘러진 사각형 틀 안에 꽃봉오리 모양의 蓮蕾 9개씩이 장치된 蓮廓帶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연곽대 사이마다에는 둥근 형태의 머리 광배(圓形頭光)에 佛衣式 法衣를 착용하고 연화좌를 밟은 채 서서 합장하고 있는 帝釋天·梵天 추정의 보살형 존상이 각 1구씩 4구 배치되어 있으며, 몸체 하단부에는 연화문과 덩굴무늬가 조합된 연화당초문대가 빙 둘러서 장식되어 있다.
범종 정상부의 용뉴는 가느다란 고리 모양의 몸에 머리가 둘인 쌍용뉴로서 고리 꼭대기에는 화염에 휩싸인 화염보주(火焰寶珠)가 놓여져 있고 굽은 등에는 지느러미가 돋아 있다. 두 발은 발톱을 세워 마치 천판을 움켜쥐는 듯 힘차게 나타내었으며, 입가로부터 몸쪽으로는 길게 뻗친 뿔이 표현되어 있다.

운흥사 범종의 종뉴와 천판 복판

범종의 정상부인 天板의 복련대는 긴 장방형의 꽃잎 형태로서 두 가닥의 선으로 모양을 만들고 끝부분을 약간 솟아오르게 표현하여 장식적이다.
어깨 부분의 원권문은 원 안에 곡선적이고 유려한 필치의 梵字(六子大明王眞言 ; 옴· 마·니·반·메·훔)를 두었다. 몸체 상부에 위치한 연곽대 내의 연뢰는 8~9엽의 연판을 자리로 하여 피어나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기를 중앙에 두어 연뢰형을 이룬다.

운종사 범종 어깨 부위의 범자 원권문대

운종사 범종의 연곽대와 연뢰

연곽대 사이에 위치한 4구의 보살형 존상은 오른쪽으로 몸을 틀고 합장하고 서있는 입상형 상으로서 배를 살짝 내밀어 부드러움을 보여주며, 존상 옆쪽에는 연화받침을 한 위패 모양의 명문구획이 자리하였는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의미의 ‘主上殿下壽萬歲’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연곽대 사이의 보살형 존상

위패형 명문구획–전패

몸체 하부 연화당초문대

한편 몸체 하부의 문양대는 줄기 형태의 당초문과 연꽃의 연합체인 蓮花唐草紋帶 로서 낮은 융기선으로 나타내어 다소 섬약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세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거의 손상 없이 전해오는 네즈미술관 소장의 〈운흥사 범종〉 은 범종의 형태 및 몸체 구성상의 특징, 쌍용의 종뉴와 천판의 복련대, 종 어깨의 범자원권문, 연곽대 안에 장치된 돌기 형태의 연뢰, 보살형 존상과 위패형 명문구획, 하대 문양대 등이 완벽하여 국가문화재급으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2) 운흥사 범종의 명문 분석
<운흥사 범종>은 연곽대와 보살형 존상 사이 아래쪽에 선각으로 범종의 내력을 알게 해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운흥사 범종 명문 전체

명문 내용은 “康熙二十九年庚午五月日 固城縣西山領臥龍山雲興寺大鐘 重五百斤 (강희이십구년경오오월일 고성현서산령와룡산운흥사대종 중오백근) 大鐘大施主 金 好成 大施主 崔□鶴 嘉善大夫敬允 施主 趙成□ 大施主 □黙 兼大鐘大施主 李三□ 大施主 盧□□金 大施主 李□賛 通政大夫 金愛立 金禮發(대종대시주 김호성 대시주 최□학 가선대부경윤 시주 조성□ 대시주 □묵 겸대종대시주 이삼□ 대시주 노□□금 대시주 이□찬 통정대부 김애립 김예발)”이다.

먼저 첫 단락의 “康熙二十九年庚午五月日 固城縣西山領臥龍山雲興寺大鐘 重 五百斤”이라는 내용은 “이 범종은 강희 이십구년(1690년) 경오년 오월에 주성한 고성현 서쪽 준령 위치의 와룡산 운흥사 범종으로 무게는 오백근이다”라는 의미로서 범종의 주성시기와 소속사찰, 범종의 무게 등 내력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大鐘大施主 金好成 大施主 崔□鶴 嘉善大夫敬允 施主 趙成□ 大施 主 □黙 兼大鐘大施主 李三□ 大施主 盧□□金 大施主 李□賛 通政大夫 金愛立 金禮發”이란 내용은 주종 시의 시주자에 대한 것으로서 “대종대시주는 김호성이며 대시주는 최□학과 가선대부인 경윤이 맡았으며, 시주는 조성□이다. 대시주 □묵 겸 대종대시주는 이삼□이 맡았으며, 대시주는 노□□금과 통정대부 김애립과 김예발이 맡았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시주자에 대한 내용 가운데 끝부분의 ‘通政大夫 金愛立 金禮發’은 운흥사 범종을 주성한 장인들로서, 이 가운데서도 특히 ‘통정대부 김애립’은 ‘김용암(金龍岩)’ ‘김상립 (金尙立)’과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사장계(私匠系) 주종장이다. 그가 참여하여 주성한 범종은 여수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1665년, 보물 제1556호)과 일본 소재〈운흥사 범종〉(1690년), 고흥 〈능가사 범종〉(1698년, 보물 제1557호)으로 ‘김애립’ 주성의 대표적 유물이다.

2. 조선 후기 私匠系 鑄鍾匠 金愛立의 주성 梵鍾

조선시대 후반에 이르면 임진왜란 전까지 장인사회를 주도했던 官匠이 붕괴되는 대신 승려신분의 僧匠1) 집단과 개인적인 직업 장인인 私匠2) 집단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된다.
17세기 중엽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승장계의 대표적 주종장 思印과 쌍벽을 이루며 金龍岩과 함께 사장계를 이끌어 온 ‘김애립’3)은 김용암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주종장으로서4), 범종을 비롯하여 金鼓와 鉢盂5) 조성에 있어서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어 주성장으로서 뛰어났었음이 확인된다6). 이러한 ‘김애립’은 金禮發, 崔奉立과 함께 여수 흥국사 소장의 〈대흥사 범종〉(1665년, 보물 제1556호)을 비롯하여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운흥사 범종〉(1690년), 고흥 능가사 범종(1698년, 보물 제1557호)을 조성하는 데 책임을 맡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먼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한 여수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의 경우를 보면 본래 순천 동리산(지금의 鳳頭山) 소재의 대흥사 범종으로서, 종 몸체에 남아 있는 많은 양의 명문을 통해 조성연대를 비롯하여 봉안처와 무게, 조성동기, 시주자, 산중 스님들의 명단, 주성장 등을 알 수 있다.

여수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 1665년, 보물 제1556호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 천판 연판대와 범자원권문(육자대명왕진언)

범종의 형태는 포탄형으로 정상부에 쌍용뉴와 연판문이 시문되어 전형적인 중국종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아래 어깨 부분에는 육자대명왕진언(옴, 마, 니, 반, 메, 훔)을 나타낸 梵字圓圈紋이 자리하고 있다. 몸체 중앙부 쪽 네 곳에는 蓮廓帶가 마련되고 그 안쪽에 각기 9개씩의 蓮蕾가 장치되어 있으며, 연곽대 사이에는 보관을 쓰고 佛衣式 大衣를 착용한 보살형 존상7)이 위치하였다.

연곽대와 연뢰

보살형 존상

위패형 명문구획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명문8) 중의 “康熙四年乙巳三月日 全羅道順天地桐裡山 大興 寺鑄成大鍾重七百五十斤 …鑄工秩 金愛立 金禮發 崔奉立 畫工唯侃 刻工唯性 應 詮 能戒… ”라는 내용으로 보아 현재 여수 흥국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범종은 순천 동리산(지금의 鳳頭山)에 위치한 대흥사 주성의 대종으로서 무게는 750근이며 … 범종을 주성한 사람들은 김애립, 김예발, 최봉립이다. 범종 몸체 조각의 밑그림은 유간이 그렸고 조각은 유성, 응전, 능계 스님이 맡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 명문 1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 명문 2

다음의 예로는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의 〈운흥사 범종〉을 들 수 있다. 포탄 형태의 모양과 정상부의 쌍용뉴와 복련대, 어깨 부분의 범자원권문, 몸체 중앙 상단의 연곽대와 연뢰, 보살형 존상과 위패 모양 명문구획, 몸체에 새겨진 명문 등에 있어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의 형태와 세부 양식적인 면, 그리고 중국 종 양식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공통점이 엿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인 종의 형태 측면으로 보아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이나 〈능가사 범종〉에 비해 육중함이 느껴진다.

운흥사 범종, 1690 고흥 능가사 범종, 1698, 보물 제 1557호

‘김애립’ 주성의 마지막 작례인 고흥 〈능가사 범종〉 역시 가느다란 고리 형태의 쌍용뉴와 천판의 복련대, 어깨 부분의 범자원권문, 몸체 중앙 상부쪽에 마련된 연곽대와 연뢰, 연곽대 사이의 보살형 존상, 몸체 하부의 문양대 등에 있어서는 앞에서 예를 든 두 범종과 거의 동일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몸체 중앙부에 둘러진 八卦는 전형적인 중국 종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능가사 범종〉은 우리 전통 종에 중국 종 양식을 받아들인 혼합형 범종이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김애립’ 주성의 범종은 김용암과 같이 우리 전통 양식에 중국 종 양식을 받아들인 혼합형을 따르고 있다. 쌍용으로 구성된 종뉴 꼭대기에 화염보주를 두고 그 주위 천판에 연판문대를 주회시키고 있으며, 그 아래쪽 어깨 부분에는 범자원권문을 두르는 등 김애립 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보살형 존상의 표현에 있어서도 김용암을 따르면서 변화를 줌으로써 김애립의 활발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鑄造匠人慶尙道晉州地所通政大夫金愛 立…” 라는 명문을 통해 ‘김애립’은 진주 출신으로서 진주, 고성 등과 같은 경남지역을 근거로 활동할 수 있었고, 사장계 주종장 가운데 ‘通政大夫’9) 라는 관직명을 사용하여 대표적 주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II. 운흥사 범종의 造形美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의 〈운흥사 범종〉은 17–8세기를 대표하는 주종장 김용암을 따른 ‘김애립’이 주성한 범종으로서, 형태 및 돌기형 연뢰가 장치된 연곽대와 하대 문양대 등 전통적인 우리 범종 양식에 쌍용으로 이루어진 종뉴와 천판의 복판문대, 범자문대와 팔괘 등과 같은 중국 종 양식을 받아들인 혼합형 범종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종구가 크게 벌어져 아래쪽이 넓어진 사다리꼴의 중국 종과 달리 배 부분이 부르지 않은 원통 모양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여 안정되고 늘씬한 형태미를 갖추고 있으며, ∩ 형을 이루는 곡선적인 몸체를 한 쌍용뉴 또한 높이 솟아 탄력성을 보인다. 종뉴 주위 천판에 시문되어 있는 연판의 경우도 線條로서 연꽃잎 모양을 이루고 끝부분을 약간 솟아오르게 나타내어 날렵함이 엿보인다. 몸체에 독립적으로 나타낸 연곽대 안의 연뢰 형태 또한 단순한 돌기가 아닌 꽃봉오리 모양을 이루어 막 피어나는 듯 가냘픔과 함께 멋스러움이 한껏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애립’ 주성의 〈운흥사 범종〉은 비록 통일신라 범종에 비하여 규모나 조형적인 면에서 다소 뒤떨어진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범종의 형태면이나 전반적인 문양의 포치 및 구성으로 보아 17세기 범종으로서는 조형적으로 단연 뛰어나다고 하겠다.

III. 운흥사 범종의 반출경위

일본은 1910년의 강제 한일합병과 함께 고분 및 유적, 사찰과 불교문화재 등의 실태를 파악하고자 전국에 걸쳐 산재해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古蹟及遺物保存規則」10)과 「古蹟調査委員會規程」11)을 제정하여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의 고적조사사업이 실시되었다12). 이후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시(1937년)에는 종이와 섬유류 등 폐품회수가 지배적으로서, 쇠붙이나 고철 등의 회수는 극히 부분적으로 이루진다13). 그러나 1939년 이후 일본의 베트남 침공과 미국의 대일 설철금수로 금속류 자원의 심각한 부족상태가 도래되어 마침내 ‘금속회수’ ‘금속공출’ 등의 구호가 널리 제창되게 된다.
특히 1940년대에는 금속회수가 특별하게 강조되고 1943년 이후에는 일반 민간시설조차 파쇠하여 회수하는 시설회수 및 설비회수단계까지 나아갔다고 한다14). 이러한 총력전의 일환으로 조선에서의 금속회수는 194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며, 1940년 9월 17일 「조선폐품회수통제주식회사」를 만들고 지방 각지에도 금속관련 통제협의회를 만들어 ‘금속회수령’체제가 성립되는 등 강화일로에 놓이게 된다. 이어서 1942년 10월 30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1395호와 조선총독부고시 제1376호에 기초하여 「조선폐품회수통제주식회사」의 뒤를 이은 「조선회수자원통제주식회사」를 만들어 폐품회수 정책에서 금속회수 정책으로의 전환을 나타내고 있다.15) 이와 같은 정책 변화와 함께 농기구나 가정용 식기 및 제기는16) 물론이고 교회 집기와 종, 사찰의 의식구 및 범종까지도 징발하기에 이르게 되었으며, 1943년 3월 초 일본 본토에서 공포되고 3월 12일부터 실행에 들어갔다고 하는 ‘금속비상회수요강’에 따른 회수물건의 범위17) 가운데의 ‘2조 銅物件(銅合金製品을 포함) 2항 神社 佛閣境內의 施設物’이라는 내용을 보아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이곳에서 말하는 ‘불각경내 시설물’에서의 銅物件은 종각에 걸려 있는 梵鍾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 鍾의 헌납운동은 1942년 2월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싱가폴 함락’ 이라는 명목하에 3월 5일에도 헌납이 진행되었으며18), 1942년 9월에는 경남 마산기독교회 관하 18개 교회가 헌납하여 1942년 10월 15일 공출된 종은 장로교회에서만 헌납한 것이 무려 1,540개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이다19). 그리고 일부 3천여 교회의 종을 떼어내 자진 헌납했다고도 하며20),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사찰의 범종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나 〈성덕대왕신종〉이나 〈상원사 소장 범종〉처럼 보물로 지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헌납 회수되었다고 한다21).
그러나 우리나라 유물의 경우 숭례문(국보 제1호)을 비롯한 國寶는 1962년 12월 20일 처음 지정 등록 되었으며, 흥인지문(보물 제1호)을 필두로 하는 寶物의 경우는 1963년 1월 21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정 등록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에는 아직 지정되지 않았으나 예술적 가치가 있거나, 봉안사찰 및 주종 내력을 말해주는 명문이 확실하게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있는 범종에 대해서는 보호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네즈미술관의 창립자 네즈 가이치로의 경우 1926년 조선총독부에 순천을 기점으로 한 ‘철도부설계획’을 출원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반출 이후 예술적 가치 및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직까지는 〈운흥사 범종〉의 반출에 대한 경위 파악이 원만하게 이루지지 못하였으나 이는 장차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하여 해결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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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후반 승장계의 대표적 주종장은 竹猖을 중심으로 元應, 信元, 淨祐로 이어지며 그들을 이어 思印, 太行, 道兼, 淡衍 으로 이어져 경기, 충청, 경상지역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승장은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에 걸쳐 대활약을 보인 思印比丘로서 포탄형 몸체에 單龍과 원통형 管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鍾鈕를 하고, 상·하 문양대와 사다리꼴 蓮廓帶 등 사인비구 특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 조선 후반의 사장계 주종장은 전라남도 순천과 고흥, 경상남도 진주 고성 등 남해안 일대에서 대활악상을 보인 金龍岩을 중심으로 金愛立과 金尙立파와 윤종백, 윤취은, 이만돌, 이만숙, 이만중, 권동삼 등으로 주로 전라도와 경상지역을 활동무대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거의 동일 시기에 활약하였던 주종장 가운데 ‘김상립’이 있는데 돌림자가 동일함은 물론 활동지역 또한 같아서 형제이거나 사촌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김상립의 경우를 보면 범종의 명문 중 “金尙立子金水元 金成元…”(순천 선암사 범종 ; 1700), “金尙立子三 金水元 金成元 金成華…”(영광 불갑사 범종 ; 1702), “金尙立片手成元…”(고성 옥천사 범종 ; 1708) 이라 되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직접적인 주종장이라기보다는 아들 삼형제를 거느리고 주종에 가담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4) 僧匠 思印比丘와 私匠 金愛立의 경우 실질적으로 조선 후반 범종 주성을 이끌어 간 주종장으로서 두 분에 대해서는 최응천, 「조선 후기 범종의 부흥을 이끈 두 거장」–승장 사인비구와 사장 김애립의ㅡ작품, 『보조사상』51집, 2018. 7. pp.42–72 참조 바람.
5) 여수 흥국사 소장 대흥사 범종 주성 이후 금고 조성의 예는 靑谷寺 金鼓(1681년)가 있으며, 발우로서는 여수 흥국사 발우 (1677), 靑谷寺銘 佛器(1684년, 2008년 불교문화재연구소 측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시 김애립 작으로 확인되었음 ; 『한국의 사찰문화재』–경상남도Ⅰ, 문화재청·대한불교조계종, 2009. p.231 참조) 등이 있다.
6) 김애립의 활동과 작품에 대해서는 최응천, 「鑄金匠 김애립의 생애와 작품」 『美術史學誌』제1집–여천 흥국사의 불교미술, 국립중앙박물관, 1993. pp.207–217을 참조 바람.
7) 김애립이 주성한 흥국사의 대흥사 범종과 운흥사 범종, 능가사 범종에 보이는 보살형 존상의 경우 天衣를 걸치지 않고 마치 궁중복식과도 같은 모양의 큰 겉옷을 입었거나, 팔 부분에 표현된 지느러미 형태의 장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보살상이라기보다는 하늘을 다스리는 帝釋天과 梵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8) 순천 대흥사 범종에 남아 있는 명문 全文 및 명문 분석에 대해서는 최인선, 「여수 흥국사 소장 ‘순천 대흥사 동종’에 대한 고찰」–명문 분석을 중심으로, 『문화사학』32호, 한국문화사학회, 2009. 12. pp.200–204 참조.
9) ‘通政大夫’는 본래 정3품의 上階로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하였으며, 宗親과 儀賓의 품계로도 함께 사용하였다. 장인들의 경우 사용하는 통정대부라는 관직명은 실질적인 관직이 아니라 재물 을 받고 형식상의 관직을 부여하기 위해 발행한 임명장으로서 공명첩이라고도 한다.
10)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官報』, 府令 제52호, 1916. 7. 4
11)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官報』, 訓令 제29호, 1916. 7. 4
12) 1916년 1918년의 고적조사 사업내용에 대해서는 朴鎭利, 「일제강점기 문화재 반출과 조선인의 대 응」, 2016, 강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pp.8–15의 〔표 1〕, 〔표 2〕, 〔표 3〕을 참조바 람. 그러나 5개년 계획 중 1919년과 1920년의 고적조사사업은 3·1운동의 여파로 규모가 축소되어 버렸다(朴鎭利, 「일제강점기 문화재 반출과 조선인의 대응」, p.15).
13) 김인호 , 「 태평양전쟁 시 기 조선에서 금속회수운동의 전개와 실 적 」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6 2 , 2008 , 한국민족운동사학회, p.306 참조.
14) 주 2)와 동일
15) 김인호, 「태평양전쟁 시기 조선에서 금속회수운동의 전개와 실적」 , p.324 참조.
16) 김인호, 「태평양전쟁 시기 조선에서 금속회수운동의 전개와 실적」 , p.328 참조.
17) 회수물건범위에 대해서는 김인호 , 「 태평양전쟁시기 조선에서 금속회수운동의 전개와 실 적 」 ,pp. 6 0 – 6 1 수록 내용을 참조바람.
18) 『매일신보』1942. 2. 25(김인호, 「태평양전쟁 시기 조선에서 금속회수운동의 전개와 실적」, p.326 수록)
19) 김인호, 「태평양전쟁 시기 조선에서 금속회수운동의 전개와 실적」 , pp.326–327 참조.
20) 손정목, 『일제강점기 도시사회상 연구』, 1996. 일지사, p.220
21) 손정목, 「일제강점기 도시사회상 연구」,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