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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흥사 범종의 봉안

I. 머리말

운흥사 범종을 첫 대면한 것은 35년 전인 1983년 7월 어느 날이었다. 우리 불화 조사차 일본 전역을 답사하던 중 마지막으로 동경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 가장 많은 우리 불화를 소장하고 있는 근진미술관(根津美術館, 네즈미술관)을 찾았을 때였다. 현관문을 들어서기 전 건너편 정원 뜰에 거대한 우리 종이 눈에 띄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종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어 종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 대단한 크기에 우선 놀랐고, “강희 29년 고성 운흥사 대종 云云”하는 명문을 읽고서야 고성 운흥사의 대종이었구나 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종 만든 주조 장인이 김애립(金愛立)이라는 속인이었던 사실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1980년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시대 종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을 때여서 조선시대 종의 현황이나 특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 종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를 이 운흥사 종이 마련해준 셈이다. 운흥사 범종에 대한 논의를 준비하던 중 한국범종연구회 월례발표회 때 우선 간단한 약 보고로 간략히 논의한 바 있다.

그 후 본격적인 논문을 준비하였지만 여러 사정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점이다.

II. 운흥사 범종의 도상 특징

운흥사 범종은 여러 가지 특징이 보이고 있다.
첫째, 조성명문에 보이다시피 조선시대 종 가운데 상당히 큰 편(종신 125cm, 총 150cm정도)에 속하는 대종(大鐘)이라 할 수 있다. 한눈에 보더라도 당당하고 웅장하고 위엄 있게 보이는 것이다.

둘째, 전통적 종 형식에 중국적 종 특징이 일부 가미되고 있는 점이다. 종 꼭지가 용을 조각한 이른바 용뉴인데 신라 전통식은 용 한 마리를 걸쇠로 사용하였으나 조선 초부터 일부 종에 두 마리의 용뉴가 조각되고 있어서 중국식을 채용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종신 상단에 연꽃이 세워진 입면대 대신 상부에 연판을 새겼고 당초문 상대 대신 범자로 대신했으며 유곽이 종신 중앙으로 내려오고 비천 대신 보살이나 천부를 새겼으며 하대가 위로 올라오는 등 새로운 도상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종 상부가 일부 중국식을 도입했지만 기하학적인 구획을 짓고 있는 중국식 종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중국식이 일부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대신 신라 전통식과는 다른 상대에 범자, 중앙에 유곽, 비천 대신 보살이나 천부상, 하대의 중부 진출 등 새로운 조선식 도상을 창안해내어 조선식 미감을 한껏 살리고 있는 점이 눈에 띄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종 조성 장인이 스님 장인(僧匠)이 아닌 사장(私匠)인 김애립(金愛立) 등이라는 사실이다. 종은 절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관아 등에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불교미술이나 불구와는 달리 조선후기에도 상당수의 사장들이 활동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김애립은 흥국사 범종(1665년), 능가사 범종 (1698년) 등 대표적인 범종을 조성한 당대 최고의 거장이어서 그의 솜씨가 최고로 발휘되던 1690년에 이 종을 조성하여 이른바 조선후기 최고의 종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III. 운흥사 범종의 봉안문

운흥사 범종은 조성명문에 있다시피 고성 운흥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저명한 범종이었다. 이 범종이 언제 일본 근진미술관에 소장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로 살펴보면 근대인 190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에 도해(渡海)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 경위는 도난, 공출, 매매 등 세 가지로 생각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따라서 법적으로 이 범종을 찾아 원 봉안처인 운흥사에 봉안할 방도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흥사는 몇 가지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증여나 매매를 통하여 찾는 방법이다. 이 방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재로서는 소장자의 선의에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차선책은 소장자의 동의를 구하여 모본을 제작하는 일이다. 꼭 같은 종을 주조하여 운흥사에 봉안하면 이 역시 수백 년 지나면 문화재로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방안을 성취하자면 인내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첫째, 제1단계로 운흥사 범종의 모본을 제작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모본 제작에는 소장자의 허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소장자의 협조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먼저 운흥사 범종을 돌려달라는 막무가내식 요청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신뢰부터 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뢰를 얻자면 서로 간에 왕래가 필요하다. 본사 쌍계사와 당사자인 운흥사의 대표가 범종 소장자를 정식 초청하여 종교적인 믿음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류를 다년간 이행하면서 신뢰를 쌓는다면 소장자는 모본제작을 허락한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인들의 장점은 신뢰와 믿음을 가지면 호의를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가 오래 유지된다면 불교적 신심이 돈독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본 제작에 성공하면 모본을 최대한 존중해야 할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오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뜻밖의 결과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언제나 살아있기 때문이다.

IV. 맺음말

불교의 인과(因果), 즉 연기설은 변치 않는 진리이다. 운흥사 범종도 인과에 따라 앞으로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운흥사 범종은 1690년 당대 최고의 장인인 김애립이 조성한 17세기의 대표적 걸작에 속하는 범종이다. 당시 수많은 승속의 간절한 시주에 의하여 조성된 이 범종의 성스럽고 웅장한 법음(法音) 소리가 세상에 널리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