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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덕 사진전
'고산스님'

예술작품에는 ‘생명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작은 풀잎 하나하나에도 살아있는 생명성을 표현해내는
주명덕 선생은 선,교,율 뿐만 아니라 사판의 교화까지 겸비하신 근대 선지식인으로서 추앙받고 계신
고산 대종사님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었습니다.
고산문화재단은 2017년 10월21일부터 28일까지 석왕사 천상법당에서 주명덕 사진전 ‘고산스님’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대가 주명덕 선생이 2017년 4월부터 9월까지 지리산 쌍계사, 부산 혜원정사, 통영 연화사, 부천 석왕사에서 고산스님을 촬영한 작품 42점이 전시됩니다.
예술작품에는 ‘생명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작은 풀잎 하나하나에도 살아있는 생명성을 표현해내는 주명덕 선생은 선,교,율 뿐만 아니라 사판의 교화까지 겸비하신 근대 선지식인으로서 추앙받고 계신 고산 대종사님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각박한 현대인들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전시회와 함께 도서출판 반야샘에서 주명덕 사진집 ‘고산스님’과 2018년 달력이 함께 출판되었습니다.

고산스님
쌍계총림방장 고산큰스님께서는 1948년 사미계를, 1956년 비구계를 받은 이후, 기도와 정진을 쉬지 않고 경經, 율律, 론論 삼장을 습득하셨습니다. 1961년 당대의 대강맥으로 알려진 고봉高峯 큰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김천 청암사, 부산 범어사 등의 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1972년에는 만하승림 성월 일봉 영명 동산 석암錫岩 대율사로 이어진 계맥을 범어사금강계단에서 전계傳戒를 받아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계대화상을 역임하셨습니다.

고산큰스님께서는 득도得度 이후 범어사, 해인사, 직지사, 청암사 등 제방의 선원에서 23안거安居를 성만成滿 하셨습니다.
고산큰스님께서는 수행을 통해 선지禪旨의 깨달은 바가 있어, 몸과 마음을 연마하고 모든 반연을 놓아버리셨지만,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진정한 해탈행임을 자각하시고 전국 사암에 나아가 경전강의와 순회포교 및 보살계로 전법교화를 하셨으며, 조계종 전계대화상으로 수많은 수행자를 배출하셨습니다. 또한 선, 교, 율 등 삼장을 두루 섭렵하신 현세의 고승으로 고산큰스님의 전법교화는 지금까지 70년째 그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지은책으로는 “우리말 불자 수지독송경” “반야심경 강의” “대승기신론 강의” “사람이 사람에게 가는 길” “지옥에서 극락으로의 여행” “머무는 곳이 없이” “나뭇가지가 바람을 따르듯이” “노래시집, 마음이 곧 부처다” “다도의범” “관세음보살 영험록, 소원을 이루는 법” “돈황본 육조단경 강의” “보살계 법문”과 자서전 ”지리산의 무쇠소” 등이 있습니다.

주명덕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대가 주명덕(1940~)은 1966년 첫개인전 <홀트씨 고아원>으로 한국의 현대적 기록사진을 시작한 장본인이자 사진매체의 순수함을 지켜온 대표사진작가입니다.
주명덕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초기작을 거쳐 한국의 공간과 자연을 ‘흑백의 미’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1968년에서 1973년까지 중앙일보사 기자를 역임하고, <한국사진역사>전 운영위원장,사단법인 민족사진작가협회 회장, 제1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펼쳐내면서
은법미제자恩法迷弟子 영담 구배九拜
“조사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高字 봉峰字 노스님의 말씀이시다.
당대의 대 선사이시고 대 강백이신, 그래서 대 선지식 이라고 칭송하는 어른 이신데, 어록 하나 없고 그 좋은 글씨 한 점 없다. 그야말로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다. 어쩌다가 낙관도 없는 친필을 만나면 부처님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런 노스님과는 달리 우리스님은 붓글씨도 많이 쓰시고 그동안 많은 저서와 법문을 남기셨다. 그래서 그동안 각처에서 하신 법문을 녹음해 놓았다가 정리하여 ‘쌍계총림 신서’라는 이름으로 스님의 출가 70(2016년)주년을 맞이하여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부산 동래포교당에서는 동짓달 한 달 동안 화엄산림을 하는 전통이 있다. 아마도 한 달 동안 화엄산림 하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동래포교당 뿐일 것이다. 그러니 신도들의 신심이 얼마나 강했겠는가? 스님께서는 70년도에 동래포교당 주지로 부임하셔서 한 달 동안 혼자서 하루에 세 번, 두 시간씩 법문을 하셨다. 그때는 커다란 테이프를 거는 릴 녹음기뿐이었다. 당시 나는 어려서 녹음의 중요성을 몰랐다. 해서 동래포교당 화엄산림은 녹음자료가 없다. 한스러울 뿐이다.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스님의 법문을 불자들에게 전할 수 없음이 한스럽다.

이렇게 건강하셨던 우리스님께서도 이제는 팔십이 넘은 노구이시다 보니 육신을 움직이는 부속이 고장 나셨다. 지칠 줄 모르며 동분서주 중생교화에 게을리 하지 않으셨는데 건강에 적신호가 온 것이다. 예전 같지가 않으시다.
의사선생님과 상담할 때 같은 병원에 다니는 석왕사 신도님을 만났다. 의사선생님은 그 신도님으로부터 큰스님의 명성을 들으셨는지 “스님들은 생과 사를 초월하셨지만 건강하셔야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하는 많은 중생들에게 법문을 많이 해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식이요법을 권장하신다. 의사선생님의 이 말씀에 석왕사에 계시면서 식이요법을 하시게 되었다.
그 결과 차츰 건강을 회복하셨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위험한 고비는 넘기셨다. 그렇지만 예전만은 못하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경을 쓰시면 좋지 않다는 것이 선생님의 말씀이셨다. 전에는 스님의 말씀에 따지고 대들고 하다가 수도 없이 얻어맞았다. 우리스님의 손은 체구에 비하여 큰 편이다. 한 대 맞으면 머리가 띵하다. 요새는 그런 손맛도 보기 어렵다. 어쩌다 화를 내시면 그나마도 좋아지셨다는 신호이니 좋긴 하다. 어쨌거나 좋아지셔서 좋다. 따지고 대들 수 없으니 섭섭(?) 하지만 한시름 놓았으니 좋다. 그나마도 잘 따라주셔서 위험한 고비는 넘기셨으니 고맙고 그저 고마울 뿐이다. 잘 따라주신 은사스님께 지면을 빌려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소일거리로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신다. 손가락 으로 가르치시며 저기에 텃밭을 만들어달라고 하신다. “거기는 밭을 할 자리가 아니라서 안됩니다.” 하니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나서신다. 그렇지 않으면 스님은 연화도 섬으로 들어가신다고 하신다. 작은 텃밭이 생기게 되었다. 그 덕분에 청정 무공해 채소를 우리들은 먹는다. 건강이 나빠지면 그 어떤 것이든 대신 할 수 없음이 한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을 무렵 이다.

어느 날 신정아 본부장의 소개로 주명덕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주선생이 하시는 말씀이 “신정아씨는 우리 사진하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라고 하신다. 예전에 사진하는 사람들을 예술가로 생각지 않을 때, 신정아씨가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로 일을 하면서 과감하게 주명덕선생 초대전시를 비롯하여 많은 사진작가들의 전시회를 열어 그 때부터 사진가들이 예술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신정아가 오라고 하면 당연히 와야 한다고 하신다.

큰스님의 건강이 조금은 좋아졌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번개처럼 스친다. 가끔 생각해 본다. 서천 무지랭이 촌놈이 출가하여 훌륭한 스승 만나서 배움이 이 정도라도 되었으니 용된 것이 아닌가. 내가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있었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수십년전 어느 날 큰스님께서 어느 노스님의 말씀을 전해주신다. “세속에서는 가정교육이 있어야 하고 출가해서는 스승교육이 있어야 한다. 가정교육도 없고 스승교육도 없으면 호로자식이라고 한다.”라는 말씀이시다. 아마도 말 안듣고 뺀질대는 나를 훈육하신 것이다. 세속에서는 부모의 은혜요, 출가해서는 스승의 은혜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아무리 은혜를 갚는다 하더라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대신 할 수 없으니 마음만 졸일 뿐이다.
인왕산 그늘이 광동 80리 간다는 말이 있다. 세속에서는 부모요, 출가자는 스승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못나도 부모요 잘나도 부모이듯이, 잘나도 스승이요 못나도 스승이다. 효가 따로 있지 않다. 보현보살 10대원에 청불주세請佛住世, 즉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은, 일체중생들을 이롭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스님도 세상에 오래 계시며 잔소리 많이 듣는 것이 효다. 어린아이는 가정의 꽃이요 노인은 가정의 지혜의 등불이라고 했다.

끝으로 무거운 사진기 가방을 메고 산에 올라가실 때는 주명덕 선생은 우리스님보다 더 헐떡거린다. 그렇지만 사진에 있어서는 최고인 이 어른도 성질이 별나서 장대비가 내려도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고 온몸이 흠뻑 젖도록 셔터기를 누르신다. 전시기획은 신정아 본부장이 했다. 별난 세 분이 만나서 자연스러운 스님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음을 밝혀둔다.

불기2561년 가을 석왕사중창 40주년을 맞이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