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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립 범종과
네즈미술관 소장 운흥사종



김애립(金愛立)의 범종과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운흥사종(雲興寺鐘)

17세기 중엽부터 후반까지 승장 사인비구(思印比丘)와 쌍벽을 이루며 사장(私匠) 집단을이끌어나갔던 김애립(金愛立)은 그 계열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김용암(金龍岩)에서 찾을 수 있다. 김용암은 용흥사종(龍興寺鐘: 1644), 대원사종(大原寺鐘: 1657), 만연사종(萬淵寺鐘: 1660)을 만든 장인으로서 쌍룡이 서로 보주를 쟁취하는 모습의 용뉴 밑으로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의 외연을 두른 연판문대와 종신에 부조된 용문과 같이 중국종 양식을 따른 경향을 지녔다.

그러나 방형의 연곽(蓮廓)과 그 사이마다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종구 쪽에 하대를 장식하는 등 우리나라 전통종과의 혼합을 보여준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인 용흥사종을 살펴보면 천판 위에 머리를 낮게 숙인 용 머리는 4개로서 그 가운데 두 마리의 용만이 몸체가 표현되어 종 고리를 만들고 정상에 여의주를 받쳤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천판과 용뉴를 중심으로 연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는 의장 표현은 김용암 종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나중에 김애립 범종에까지 영향을 준다. 연곽 사이마다 배치된 4구의 보상입상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합장한 모습으로서 4구의 보살상 중 앞, 뒤쪽에 배치된 보살상 아래쪽으로는 王室을 축원하는 위패형(殿牌形) 장식이 첨가되었다. 하대는 종구에서 약간 올라와 2줄의 융기선을 두르고 매우 넓게 장식되었다.

이 안에 장식된 용무늬는 고견사종(古見寺鐘: 1630), 보광사종(普光寺鐘: 1634)과 같이 승려 장인에 의해 제작된 범종에 보이는 파도 속에 표현된 용문과 달리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움켜쥔 운룡文으로 표현된 점이 다르다. 이후 김용암의 범종에서는 하대와 상대 문양을 조금씩 바꿔가며 표현하는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종신 중앙에 새겨진 명문에 보이는 ‘주정 통정대부 김용암(鑄鍾 通政大夫金龍岩)’을 통해 17세기 범종에서 통정대부라는 명예 가호를 가장 먼저 쓴 사장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김용암의 범종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김애립 역시 전라남도의 순천과 고흥, 그리고 경상남도의 진주, 고성 등과 같이 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범종과 금고, 발우(鉢盂)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제작활동을 하였던 사장계(私匠系)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김예발(金禮發), 최봉립(崔奉立)과 한조를 이루어 대흥사종(大興寺鐘: 1665), 운흥사종(雲興寺鐘: 1690), 능가사종(楞伽寺鐘: 1698)의 범종을 만들었고 흥국사 발우(興國寺 鉢盂: 1677), 청곡사 금고(靑谷寺 金鼓: 1681), 청곡사명 불기(靑谷寺銘 佛器 : 1684)를 비롯하여 사장(私匠이면서도 유일하게 국가에서 감독한 佛狼機砲(1677)를 제작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도 매우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았던 장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김애립에 의해 1665년에 제작된 興國寺鐘(사진 14)은 명문에 의하면 원래 順天 桐裏山의 大興寺라는 절에서 750근의 중량을 들여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종의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마치 포탄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두 마리의 쌍용으로 구성된 용뉴는 고리 부분을 하나의 가느다란 몸체로 연결시켰고 정상부에는 두발로 보주를 받쳐 든 형태이다. 음통이 없는 대신 천판 중앙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이 구멍을 중심으로 2겹으로 구성된 8잎의 연화문이 천판 외곽까지 이어지도록 시문되었다. 종신의 상부에는 상대의 표현이 없이 한 줄의 융기선만을 둘렀고 그 아래로는 12자의 범자문을 내부에 ‘六字光明眞言’이라고 양각된 원권문과 함께 시문하였다. 범자문 아래의 종신 중단쯤에는 사다리꼴의 연곽을 네 방향에 배치하였고 연곽대 안으로는 물결치는 듯한 3조의 융기선을 중심으로 그 안팎에 유려한 당초문이 장식되었다.

그리고 각 연곽 안에는 8엽의 화문자리 위에 낮게 돌기된 연뢰를 9개씩 배치하였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네 면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1구씩 도합 4구가 시문되었는데, 보살상의 머리 위로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유려한 천의를 걸친 모습이다. 종신 아래 부분에는 많은 시주자 명단과 제작자 등이 기록되었다.

김애립은 다른 장인들과 달리 범종 제작만 한 것이 아니라 사찰의 금고(金鼓)와 발우(鉢盂)와 같은 다양한 불교공예품을 만들었고 특히 국가에 소속된 관장들이나 가능한 국가의 大砲 제작에도 참여한 점이 주목된다. 김애립이 제작한 불랑기포(佛狼機砲)는 두 점이 확인되는데, 남포시 강서구역에서 출토되었다는 북한 소재의 1676년작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677년명 포 이다. 이들의 명문에 의하면 김애립은 감독관인 신기립(申起立)의 감독 책임 하에 만들었던 불랑기포를 완성할 때까지 이름 앞에 아직 변수(邊手), 또는 장인(匠人)이라고만 기록하였다.

특히 김애립은 1665년 대흥사종에서는 통정(通政)이라는 직책을 사용하지 않다가 국가에서 부역을 치룬 4개월 후에 제작한 흥국사 발우에서 처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관계를 사용하게 된다. 물론 실제의 관직은 제수 받지 않았겠지만, 일반 백성이 의무적으로 치러야 했던 부역을 김애립은 대포를 제작하는 관장의 역할로 대체한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즉 당시로서도 관장(官匠)이나 가능했던 국가의 대포를 사장이었던 김애립이 제작하게 됨에 따라 통정대부라는 명예가호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당시 장인 사회에서의 위치나 활동을 가늠하는데 커다란 역할이나 명예를 하였다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이처럼 김애립은 불교공예품을 주로 제작한 직업 장인이면서 국가의 대포 제작에도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매우 지닌 뛰어난 역량을 국가에서 활용코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에 충실한 기술을 지닌 직업 장인들을 官匠으로까지 발탁하여 활용하였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준다.

이후 1681년에 들어와 제작한 청곡사 금고는 그동안 범종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조활동을 하였던 김애립이 진주를 포함한 경남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행적을 밝혀준다. 명문에 의하면 1681년에 청곡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어 많지 않은 조선 17세기 금고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아울러 고려시대 뿐 아니라 조선시대 범종 장인들이 사찰의 요구에 의해 이처럼 금고를 함께 제작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전체 직경은 79cm로서 뒷면이 넓게 뚫려 공명구가 형성된 통식의 금고이지만 고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두 줄의 동심원만을 선각으로 시문하여 3구로 구획하였다. 특히 원형의 당좌구는 그 전체가 한단 높게 돌출되어 있으며 후면에서도 이 부분이 움푹 파여 들어가 있다. 측면에는 2줄의 융기동심원을 주회시키고 이 곳 한단에 3개의 반원형 고리와 종서로 된 음각 명문을 새겼다.

1684년에는 청곡사(靑谷寺)의 청동제 불기를 제작하는데, 직경이 92cm에 이루는 대형 작품이다. 구연은 바깥으로 외반되었고 몸체 측면 양쪽에 하나가 아닌 두 개씩의 둥근 고리가 달려있는 점은 중량을 고려하여 들기 편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몸체 아래로는 높은 굽이 달려있다. 이 대형의 청동 공예품은 그 크기로 미루어 대중 공양용으로 만든 발우로 짐작된다. 명문에는 ‘양공통정대부김애립(良工通政大夫金愛立)’ 이라고 기록되어 흥국사 발우부터 사용된 통정대부의 관계를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다시 김애립은 흥국사종을 만든 25년 뒤인 1690년에 운흥사종을 제작한다. 이 종은 현재 일본 동경 시내에 위치한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지하 1층에 전시되어 있다. 이 종 역시 김애립 범종에서 공통적으로 등장되는 중국종과 전통형 종이 혼합된 혼합종 계열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하나의 몸체로 연결된 쌍용의 용뉴와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장식된 천판의 연판문은 흥국사종과 동일하지만 그에 비해 입체감이 더욱 강조되었다. 종신의 상부 쪽에는 상대 없이 원형테두리를 두른 범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였고 연곽(蓮廓)은 흥국사종에 비해 조금 아래쪽으로 더 내려온 중신 중단쯤에 위치하고 있다. 연곽대에는 흥국사종의 당초문과 유사하지만 굴곡이 보다 완만해지고 그 내, 외부를 넓은 잎으로 장식한 점이 다르고 연곽 내의 연꽃 봉우리는 크기가 좀 더 확대되었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배치된 4구의 보살입상은 몸을 오른쪽으로 돌린 채 합장한 모습으로서 둥근 두광(頭光)을 지니고 양 어깨에 걸친 통견의 법의에 독립된 연화좌를 밟고 있는 모습이 흥국사종과 거의 동일하다. 한쪽 종신 면 보살상 옆에 붙어 위패형(位牌形)의 명문구(銘文區)를 장식하여 내부에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三殿下壽萬歲)’라는 명문을 유려한 필치로 양각하였다. 그리고 보살상과 연곽 바로 아래의 종신 하부를 돌아가며 긴 내용의 발원문과 시주자 명단을 양각시켰다. 명문에 의하면 1690년에 ’고성현 서산령 옹룡산(固城縣 西山領臥龍山)의 흥국사 대종(雲興寺 大鐘)으로 오배근(五百斤)의 중량을 들여 제작된 것’이라는 내용과 말미에는 종의 제작자인 ‘통정대부 김애립(通政大夫 金愛立)과 조역인 김예발(金禮發)’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김애립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지막 범종이 1698년의 명문을 지닌 고흥 능가사종이다. 말년의 작품이지만 오히려 그 크기나 기술적 역량 면에서 가장 최고조에 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종신의 전체적인 外形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넓게 벌어져 운흥사종 보다는 흥국사종과 유사하며, 용뉴는 쌍용으로 구성되었다. 쌍룡의 정상부에는 여의주를 움켜쥔 모습이지만 용의 비늘과 용두의 표현 등이 더욱 역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天板上의 중앙에 뚫린 소공을 중심으로 주회된 연판문도 상·하 2단의 층단을 이루며 중첩 시문된 점이 독특하다. 상대 없이 천판의 연결 부분에는 1조의 융기선만이 시문되었고, 그 아래로 원권(圓圈)을 두룬 12자의 범자문이 주회되었는데, 이 역시 앞서의 범종들에 보이던 범자문과 동일한 표현이다. 연곽은 운흥사종에 비해 조금 더 종신 상부 쪽으로 올라가 있으나, 연곽대 안의 당초문과 연뢰는 동일하여 앞 시기의 문양판을 계속 사용한 것으로 믿어진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에는 1구씩 도합 4구의 보살상이 매우 유려한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모두 이중 두광에 머리위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부풀어 오른 대의의 앞자락 주위에는 지느러미 같은 장식이 첨가된 제석·범천형(帝釋, 梵天形) 보살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제석 범천형 부조상은 선암사 대각암종(仙巖寺 大覺菴鐘: 1657)을 시작으로 17세기 후반~18세기에 제작된 범종에서 가장 널리 유행된 형식이다. 종신 한쪽에는 이러한 제석· 범천형 보살상과 함께 전패(殿牌)를 첨가하였는데. 흥국사종의 형태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문양이 조금 더 도식화되었고 내부에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三展下壽萬歲)’라는 한 줄의 양각 명문이 첨가된 점이 다르다. 이 범종에서는 특히 보살상과 연곽대 바로 아래 붙어 八卦를 장식한 점이 독특하다. 下帶는 운흥사종과 같은 형식으로서 종구(鐘口)에서 조금 떨어진 위쪽으로 올라와 배치되었다. 상·하단을 융기선의 띠로 구획하여 내부에는 넝쿨형의 줄기로 이어진 만개된 菊花 형태의 花文을 연속 시문하고, 그 사이의 여백을 엽문(葉文)으로 가득 채웠다. 종신 중단에 빽빽이 기록된 명문에는 이 종이 강희37년 흥양산 능가사(康熙37年 興陽八影山楞伽寺 )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당시의 제작자로는 절충장군(折衝將軍 金愛立)의 이름이 보이며 그 아래 통정 김예발(通政 金禮發), 통정 김귀천(通政 金貴千)과 이미남, 강옥선(李昩南, 姜玉善) 그리고 조역으로 행원(幸垣)의 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까지 통정대부를 사용하던 김애립이 수장으로 그 지위를 더욱 인정받아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한 단계 올라간 명예 관계를 사용하게 되며 그 조역이었던 김귀천과 이말남이 통정의 관계를 물려받게 된 당시 주금장(鑄金匠) 사회의 일면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애립이 제작한 범종은 김용암과 마찬가지로 역시 혼합형(混合形) 범종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정상에는 보주를 움켜쥔 쌍용의 용뉴와 천판 외연에 연판문(蓮瓣文)을 주회시키고 상대 없이 종신 상부에 범자문 만을 둘렀다. 네 구의 보살입상 가운데 한쪽에만 위패형 명문구位牌形 銘文區)와 함께 배치하며 하대에만 장식되는 연당초문이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그러나 보살입상은 사인비구나 김용암과 같은 장인들의 경우와 달리 종마다 조금씩 도상(圖像)의 변화를 주고 있는 점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전통을 중시하는 승려장인(僧匠)과 달리 주문에 따라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직업장인(私匠)의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김애립이 만든 흥왕사 발우의 명문에 보이는 것처럼 ‘주조장인경상도진주지소통정대부김애립(鑄造匠人慶尙道晋州地所 通政大夫金愛立)…’ 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어, 그의 출신지가 진주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애립은 진주의 청곡사와 고성의 운흥사와 같이 경남 지역을 근거로 활발한 주조 활동을 하였던 사장의 대표적 인물임이 확인된다.

토쿄 네즈 미술관 (東京根津美術館) 소장 강희29년명 (康熙 29 年銘 ; 1690) 운흥사종(雲興寺鐘), 총고 125.0cm

토쿄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의 강희29년명(康熙29年銘) 운흥사종(雲興寺鐘)은 조선 17세기의 대표적인 장인인 김애립(金愛立)이 만든 범종 가운데 하나이다. 이 종은 명문에 보이듯이 원래 경남 고성군의 운흥사종으로 1690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종의 외형은 김애립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몸체로 이루어진 쌍용의 용뉴와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장식된 천판의 연판문 등 여천의 흥국사종(興國寺鐘: 1665)과 동일하지만 그에 비해 입체감이 더욱 강조되었다. 상대 없이 원권의 범자문을 둥글게 장식하였으며 연곽은 흥국사종에 비해 조금 아래쪽으로 더 내려온 중신 중단쯤에 위치하고 있다. 연곽대의 문양은 흥국사종의 당초문과 유사하면서 굴곡이 보다 완만해지고 그 내,외부를 하엽문(荷葉文)으로 장식한 점이 다르며 연곽 내의 종유도 크기가 좀 더 확대되었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배치된 4구의 보살입상은 좌측으로 몸을 돌린 채 합장한 형태로서 단선의 원형 두광,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독립된 연화좌를 밟고 있는 모습이 흥국사종과 거의 동일하다. 한쪽 종신면 보살상 옆에 붙어 위패형의 명문구를 두고 내부에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三殿下壽萬歲)’의 양각명을 유려한 필치로 새겨 놓았다.

그리고 보살상과 연곽 바로 아래의 종신하부면을 돌아가며 긴 내용의 명문을 양각(康熙二十九年庚午五月日」 固城縣西嶺臥龍山雲興」寺大鍾重五百斤」 大鍾大施主 金好成」 施主 崔用鶴」 嘉善大夫敏允」 施主 趙戒作」 大施主 大黙」 兼大鍾施主 李三卯」 大施主盧於叱金」 大施主李時贊」 鑄鍾通政大夫金愛立」 金禮發 大功德前和尙嘉善慈冾」前和尙判尹英卞」 前和尙通政元敎」 山中大禪師鏡琯」○○○尹」 鑄監兼 和尙住寬」 三寶呂眞」首僧旭乘」 持寺寶敏」 鑄監兼書記快一」 化主幸旭」 別坐幸旭」 別坐言海」 供養主(亻又 誰 再右)」 鑄成所持殿○○」 法堂持殿」首僧」○甘) 하였다.

말미에 종의 제작자인 통정대부 김애립(通政大夫 金愛立)과 김예발(金禮發)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김애립은 전라남도의 순천과 고흥, 그리고 경남 진주, 고성 등과 같이 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범종과 금고, 발우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제작활동을 하였던 私匠系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金禮發, 崔奉立과 한조를 이루어 大興寺鐘(1665년), 雲興寺鐘(1690년), 楞伽寺鐘(1698년)의 범종을 만들었고 靑谷寺 金鼓(1681년), 興旺寺 鉢盂(1677년)를 비롯하여 私匠이면서도 유일하게 국가에서 감독한 佛狼機砲(1677년)를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