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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닷컴] 쌍계산문은 왜 구산선문에 들지 못했나?
등록일
2017.11.18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912
쌍계산문은 왜 구산선문에 들지 못했나?
고산문화재단 학술세미나서 조범환 교수 발표
 
2013년 06월 21일 (금) 17:33:38
조현성 기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은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 구법승들이 귀국해 각자 선종 산문을 연 것을 말한다. 이들 구법승은 도의 홍척 혜철 도헌 현욱 무염 범일 도윤 이엄 스님이다.

이 가운데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개창한 도의 국사는 조계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도 의 등과 같은 시기 구법활동을 하고 함께 정진했던 진감 선사(774~850)가 세운 쌍계산문이 구산선문에 들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산문화재단(이사장 영담 스님)은 21일 동국대 학술문화관에서 ‘진감선사 혜소의 생애와 사상’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행사에서는 조범환 교수(서강대)는 ‘진감 혜소와 한국의 선불교’를 주제로 발표했다.

진감 선사는 마조도일의 제자 창주신감의 법을 받아 귀국해 쌍계총림 전신인 쌍계산문을 열었다. 선법과 함께 인도의 범패를 배워 와 보급시킨 한국 범패의 시조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진감혜소는 도의와 홍척을 이어 세 번째로 귀국한 구법승이었다. 진감혜소는 흥덕왕과 연결돼 상주 장백사에 주석했고 지방민 교화를 통한 사회안정화를 이룬 인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선행연구 조사를 통해 ▷진감의 조상이 한족인지 고구려인인가 ▷출가·유학배경 ▷당에서의 활동 내용 ▷귀국 배경 ▷흥덕왕과의 관계 ▷상주를 떠난 배경과 지리산 화개곡 ▷쌍계사 주석 ▷선종사상과 범패교화 ▷희양산문으로 이어진 법계 ▷진감선사비의 찬술과 건립 ▷쌍계사와 ‘육조정상동래연기’ 검토를 이슈로 제시했다.

이 가운데 희양산문은 창건은 도헌 스님이 했지만, 재건은 진감의 증손 제자인 긍양(878~956) 스님이 했다.
조 교수는 “긍양의 비문에 신감-(진감)혜소-도헌-양부-긍양-형초로 이어지는 법맥이 기록돼 있다”며 “희양산문은 도헌이 혜은과 진감혜소 양쪽에서 법을 받았을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양쪽에서 법을 받은 것을 부정하고 긍양의 남종선 계보를 강조하고 도헌의 봉암사 기반을 흡수하려는 의도로 법계 개정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긍양 비문에서 도헌의 비문과 달리 법맥을 정한 것은 자신과 문도를 보존하기 위한 선택의 결과이지 남종선 강조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또, 긍양이 진감혜소를 산문 조사로 추존한 것은 법계표현의 문제로 봐야한다는 주장도 있다”고도 소개했다.

조 교수는 “진감혜소의 교선교섭 사상이 있어 남종 강조를 위해 종계 변화를 시도했다고 보기도 한다. 긍양이 북종선을 견지했음에도 비문에 진감의 법맥을 강조한 것은 진감의 사상이 문도에 의해 북종선에 포용돼 계승된 근거일 것” 등으로 선행연구 견해를 정리했다.

조 교수는 “진감혜소 귀국 후 흥덕왕이 도의와 함께 그를 ‘두 보살’로 칭했다”며 “진감혜소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컸다”고 말했다. 진감혜소가 <청규>를 만든 백장회해를 만난 사실도 그의 위상을 가늠케 하는 본보기로 제시됐다.

조 교수는 “도의는 (진전사 등) 강원도에서 활동했고, 홍척은 지리산 실상사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사찰에서의 활동이 왕실에 눈에 띈 경우이지만, 진감혜소는 중국에서 이미 이름이 났기에 특별한 활동 없이도 왕실의 주목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진감혜소의 쌍계사 중심의 유심선사상은 희양산문의 점선사상과 유사해 결국 그 문도들이 희양산문으로 흡수돼 뛰어난 제자가 배출되지 못했다”는 견해를 인용해 쌍계산문이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신라 선종산문을 9개로 한정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문제가 제기된 상태”라며 “범패를 선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활용했던 진감혜소에게는 독특한 선사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감혜소가 세운 쌍계산문이 구산선문과 비교해 뒤쳐질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는 “귀국 당시에는 왕실의 주목을 받던 진감혜소가 왜 지리산 화개곡을 찾았는지, 왕의 부름에는 왜 응하지 않았는지 등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쌍계산문이 구산선문에 들지 못한 이유는) 쌍계사의 정치적 지향점과 고려 왕조의 선종 산문에 대한 태도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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